1.27달러짜리 볼트와 2027년 2월의 간극
워싱턴DC 컨벤션홀, 한 대령이 작은 쇠볼트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어 올린다. 청중석에서 보면 거의 보이지도 않을 크기다. 그런데 이 볼트, 정규 보급 체계로 주문하면 2027년 2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공용 원격무장 스테이션(CROWS) 터렛에 들어가는 부품인데, 미 육군 군수지원사령부-한국(MSC-K)이 절삭(차감)제조 방식으로 직접 깎아 만들면 개당 1.27달러, 대기 수개월이 통째로 사라진다.
괌 주둔 부대가 요청한 조립품 하나는 정가 3만6000달러가 예상됐지만 한국 기반 팀이 82달러에 만들어 보냈다. 400배 넘는 가격 차이를 만든 건 신기술이 아니라 ‘본토까지 안 보내도 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미 육군협회(AUSA) 2026 연례회의에서 MSC-K 사령관 콜 스콧 카펜터 대령과 8군사령관 조셉 힐버 중장이 이 볼트와 조립품 사례를 들고 나온 건, 한국을 인도태평양사령부(INDOPACOM) 권역의 ‘첨단제조 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카펜터 대령은 이를 두고 “나는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첨단제조 중심지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내 목표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올해 4월 주한미군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 대장의 의회 서면 보고를 토대로 ‘한국을 권역지원 허브로 삼는다’는 전략적 프레임만 짧게 소개됐다. 이번 AUSA에서 나온 1.27달러, 82달러 같은 실제 운용 단위의 숫자와, 발표자 스스로 인정한 걸림돌은 아직 국내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틈을 메우는 게 이 기사의 목적이다.
설치 전 장비로 세운 '허브'라는 간판
겉으로 보이는 건 이미 작동 중인 제조 네트워크다. 볼트도 만들고 조립품도 찍어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조금 다르다. MSC-K가 내세운 핵심 설비, 금속 3D프린터는 아직 현장에 없다. 최근에야 확보했고 설치할 인프라를 구축 중이며, 가동 목표 시점은 내년 1~2월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성과는 전부 절삭제조, 즉 금속을 깎아내는 재래식 가공으로 만든 것이다.
카펜터 대령이 ‘목표’라는 단어를 거듭 쓴 이유가 여기 있다. 적층제조(3D프린팅) 허브라는 간판은 걸려 있지만, 그 간판이 가리키는 프린터는 아직 상자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내년 여름까지 300만 달러 상당의 장비가 추가로 들어오고, 2028회계연도 예산에 1000만 달러어치를 더 요청할 계획이라는 숫자도 모두 미래형이다. 지금 보여준 건 설비가 아니라 설비 없이도 이만큼 절감했다는 증거품에 가깝다.

진짜 장벽은 쇠가 아니라 계약서
겉으로는 기술 이야기지만, 들여다보면 법률 이야기다. 힐버 사령관이 꼽은 남은 과제는 제조업체와의 지식재산권 제약, 데이터 공유 문제, 기존 육군 물류 시스템과의 연계 미비였다. 볼트를 깎아내는 건 공작기계만 있으면 되는 일이지만, 더 복잡한 부품의 설계 데이터는 대부분 원청·하청 방산업체가 쥐고 있다. 미 육군자재사령부(AMC) 부사령관 크리스토퍼 모한 중장은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는 버틸 수 없다”며 부품 단위로 지식재산권을 사들이는 새로운 계약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1년이 지난 이번 AUSA에서도 해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힐버 사령관은 “더 빠르게 고칠 수 있도록 그 과제들을 계속 풀어나가고 있다”는 말로 문제를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볼트처럼 단순하고 특허 걸릴 게 없는 부품은 쉽게 역설계되지만, 정밀 전자장비나 엔진 부품처럼 데이터가 걸려 있는 품목은 여전히 OEM의 승인 없이는 손을 댈 수 없다. ‘허브’가 다루는 범위가 아직 단순 부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허브'라기엔 작은 지갑, 너무 이른 발표
300달러, 3만6000달러 같은 절감액은 인상적이지만, 인도태평양 전역을 떠받친다는 ‘허브’의 몸집치고 투자 규모는 소박하다. 내년 여름까지 들어올 장비가 300만 달러, 2028회계연도 요청액이 1000만 달러다. 오키나와 제3해병원정군과 하와이·괌 주둔 부대까지 커버하겠다는 구상치고는 초기 자본이 크지 않다는 점은 짚어둘 만하다. 이 평가는 단정이라기보다, 숫자의 크기만 놓고 보면 그렇게 읽힐 수 있다는 정도다.
타이밍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2024년 인도태평양사령부가 ‘권역지속지원체계(RSF)’ 개념을 제시한 이래, 올해 들어서만 3월 창원 견학, 4월 브런슨 사령관의 의회 보고, 5월 하와이 심포지엄 발언, 그리고 10월 AUSA 발표까지 단계적으로 한국 거점 구상이 노출됐다. 매번 조금씩 구체성을 더하며 ‘진행 중’이라는 메시지를 쌓아온 흐름으로 보인다.
한국이 쥐는 패와 치러야 할 청구서
실제 작업대는 한국에 있다. 대구·왜관의 캠프 캐럴에 자리한 MSC-K, 그리고 지난 3월 25일 2사단과 한미연합사단, MSC-K 인력이 견학한 창원의 한국 해군 조선소 적층제조 실험실이다. 이들은 금속·비금속 적층제조 공정과 품질검사 과정을 직접 참관했다. 한국군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해군군수사령부는 3D프린터실을 가동해 연간 약 160종 부품을 생산하며 약 20억 원의 예산 절감을 기대하고 있고, 대전시는 2027년까지 250억 원을 투입해 국방·우주 소부장 3D프린팅 공동제조센터를 짓는다.
기회는 분명하다. 한국 방산 소부장 업체가 미군 공급망에 들어갈 문이 넓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걸 단순한 호재로만 읽을 수는 없다. 브런슨 사령관이 지난 4월 22일 의회에 서면으로 보고한 ‘권역지속지원거점(RSH)’ 추진은 아직 공식 예산이 배정된 프로그램인지 사령관들의 구상 단계인지조차 매체마다 서술이 엇갈린다. 그런데도 이 거점이 제도화되면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협상 테이블에 새로운 항목으로 올라올 수 있고, 인도태평양 전역을 떠받치는 군수 거점이라는 지위는 유사시 표적 우선순위 논의와도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기회의 크기만큼 치러야 할 청구서의 항목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볼트가 증명하는 건 한국의 능력이 아니라 미 육군 예산안의 설득력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 발표의 본질은 ‘한국 거점의 완성’이 아니라 ‘다음 예산을 받아내기 위한 증거 제출’이다.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핵심 설비인 금속 3D프린터조차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의 모든 성과는 절삭제조, 즉 기존 공작기계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1000만 달러 추가 장비 요청이 2028회계연도 예산안에 이미 반영될 예정이다. 작은 승리를 모아 다음 예산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군수 관료제의 순서로 읽힌다. 둘째, 지식재산권 문제는 작년 AUSA에서 AMC 모한 중장이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과 똑같은 말로 올해도 반복됐다. 1년 동안 해법 없이 같은 문제를 재확인했다는 건, 기술 전시의 화려함과 제도적 준비 속도 사이에 뚜렷한 시차가 있다는 증거다.
이 거점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다. 볼트 1.27달러, 조립품 82달러는 실제로 아낀 돈이고, 국제날짜변경선 서쪽에 장비를 더 오래 두겠다는 힐버 사령관의 구상도 합리적이다. 다만 ‘인도태평양 제조 중심지’라는 간판과 아직 상자 속에 있는 3D프린터 사이의 거리를, 전시장의 볼트 하나로 지우려 하는 건 과장이라고 본다. 내 판단이 틀렸다면, 그건 지식재산권 문제가 예상보다 빨리 풀려 복잡한 부품까지 역설계·프린팅 범위가 넓어지거나, 한국 측의 자체 투자(대전시·해군군수사령부 등)가 미군 수요와 조기에 결합해 거점이 생각보다 빠르게 정상 가동에 들어가는 경우일 것이다.
지켜볼 것
- 한국 MSC-K의 금속 3D프린터 설치와 실제 부품 출력 성공 여부 — 내년 1~2월경, 성공하면 ‘목표’가 ‘능력’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된다.
- 2028회계연도 예산안의 1000만 달러 추가 장비 예산이 의회를 실제로 통과하는지 — 내년 예산 심의 시기, 통과 여부로 이번 발표가 증거였는지 성과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 육군과 방산업체 간 부품 단위 지식재산권 매입 모델 등 구체적 해법 발표 여부 — 향후 AUSA나 의회 청문회에서, 해법이 안 나오면 올해 발언이 1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대표 사진 — 미 육군 · Spc. Keli Luangrath
본문 사진 — 미 육군 · Spc. Keli Luang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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